본문 바로가기

▒산행과여행▒/2015년앨범

경주/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 비오는날 거닐어본다...【15년5월3일】

 

 

경주 가볼만한곳 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

 

아침부터 비가내린다

산행은 어렵고 신랑이랑 가볍게 ..

 

비오는날 사진 색감 괜안넹...

울아들 휴가 나와서 모자 선물받은 기념으로...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경주의 유서깊은 양동마을을 다녀왔다.
이곳은 2010년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으로 월성 손씨(월성 孫氏)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두 가문에 의해 형성된 유서 깊은 양반마을입니다. 15세기 중반 조선시대 문신 손소(孫昭)가 양동으로 이주하고,
이번(李蕃)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곳에 정착하면서 오늘과 같은 양성 씨족마을의 틀이 갖추어졌있으며
이러한 배경으로 '외손마을'이라는 별칭이 있다고 한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신록을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청신하고 싱그럽게 노래해 힘찬 생명의 약동감을 느끼게 한다.

아카시아 잎은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듯 신록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신록이 짙어가는 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5월

오늘 솔직히 금낭화 보고파 이곳에 왓는지도 모르긋다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이다

 

 

 

 

 

 

 

 

 

 

 

 

 

 

 

경주 양동마을은 안강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포항 쪽으로 가는 도로에서 약 2킬로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월성손씨(月城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양대 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이다.

지리적으로 형산강의 풍부와 물을 바탕으로 넓은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다.

 

풍수지리상 재물 복이 많은 지형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마을 초입부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들 기와집들은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으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경상도 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ㅁ’자형이거나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간혹 대문 앞에 ‘一’자형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또한,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은 영남지방 가옥의 일반적인 특색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산과 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오랜 전통을 간직한 저택들, 양반 계층을 대표하는 많은 자료들을 보유하고 유교사상 및 생활관습들이 보존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전통마을 방문에서는 다리품을 팔아야 제멋을 느낄 수 있다.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들어오면 지나쳐버리기 쉬운 광경이나 장면들이 걸어서 들어오면 확연하고 자세히 보이는 경우가 많다.

양동마을의 간이역인 양자역만 해도 그렇다

 

지금은 새 도로가 나 있어 양자역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얼마 전만 해도 작은 간이역 주변에는 봄이면 철쭉, 여름이면 무궁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시골역의 정겨움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반촌(班村)은 어딜까? 어떤 사람들은 대뜸 안동 하회마을을 꼽을 것이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경주시 강동면의 양동마을을 칠 것이다. 그만큼 두 마을은 왕조시대 양반들의 생활상과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마을로 어금지금하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기도 하여 흥미롭다.


 

하회마을이 강물이 휘돌아가는 강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산을 의지한 산마을이다. 하회는 풍산 유씨들만의 단일한 동성부락이지만 양동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두 씨족이 세거해온 집성촌이다. 하회에는 동제()의 일부로, 유명한 별신굿이 전해내려오는 반면 양동에는 이렇다 할 동제 자체가 예로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2~3년에 한 번씩 정월 보름이나 추석 전후에 줄다리기를 하는 세시행사 정도가 있을 뿐으로, 양반계층의 기층문화를 수용하는 태도가 상이하다.

 

 

 

 

 

양동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4~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금과 같은 양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약 500년 전의 조선 초기이다.

영남대학교에서 발간한 『영남고문서집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여강 이씨 이광호(李光浩)가 양동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의 손자 사위가 된 풍덕 유씨 유복하(柳復河)가 처가를 따라 마을에 정착했다.

 

 

 이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진 월성 손씨 손소(孫昭, 1433~1484)가 유복하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여기에 눌러 살게 되었다.

여기에 이광호의 5대 종손인 이번(李蕃)이 손소의 고명딸에게 장가들어 역시 양동에 뿌리를 내리면서 이 마을은 손씨와 이씨가 세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손씨 집안에서는 손소의 둘째 아들로 벼슬이 정2품 의정부 우참찬에까지 오르고 학문이 뛰어났던 우재 손중돈이라는 비범한 인물이 나오고,

 이씨 가문에서는 이번의 맏아들로 회재 이언적이라는 걸출한 선비가 배출됨으로써 두 집안은 양동에 확실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뒤 이들 양가의 후손들이 몇 개의 분파로 갈라져 대를 이으며 오늘까지 양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오고 있다.

 

 

 

 

 

마을의 형성과정과 관련한 재미있는 말이 마을에 전해온다. 양동은 ‘외손 마을’이라는 얘기다.

 마을 형성기에 가세가 이광호 → 유복하 → 손소 → 이번 등으로 이어지면서 친손 아닌 외손들이 번성했던 점을 결과론적으로 추론하여 생긴 얘기인 듯한데,

이 말은 아직도 ‘유효하여’ 요즘도 양동 처녀라면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진담반 농담반의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손씨와 이씨 두 씨족집단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어왔다는 사실은 양동마을을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이들 두 가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척관계로 얽혀 있어 양자 사이가 평화롭기만 할 듯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두 집안간에 혼인을 통하여 공존과 조화를 꾀하기도 하지만 가문의 영예나 발전을 위해서는 심심찮게 갈등과 경쟁의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회재의 학문적 연원을 두고 손씨 집안에서는 “우재의 학문이 회재에게 전수되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이씨 가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學問淵源授受說). 그밖에도 왕조시대에는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나 조상의 묘소 문제(이른바 명당 다툼)를 둘러싸고 이따금씩 갈등을 빚었고,

 

 오늘날에는 자녀의 교육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두 씨족간의 은근한 경쟁은 마을의 공간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흔히 양동마을이 들어선 터를 물(勿)자 형국의 명당이라 한다. 마을의 진산인 설창산(雪蒼山)에서 흘러내리는 능선과 골짜기가 한자의 말 물(勿)자를 거꾸로 놓은 것 같은 형상이기 때문이다. 취락은 물자형이 만드는 네 골짜기 두동골·물봉골·안골·장태골을 중심으로 능선 위로 퍼져 올라가며 형성되었는데, 건물의 입지나 건립에서 두 문중의 경쟁을 읽을 수 있다.

 

 

 

 

 

안골의 높직한 언덕에 손씨들의 대종가(大宗家) 서백당(書百堂)이 자리잡고 있다면 물봉골의 밝은 산기슭에 이씨들의 대종가 무첨당(無忝堂)이 위치하여 대응하고 있으며,

 마을 어귀 언덕바지에서 이씨의 파종가(派宗家) 향단(香壇)이 위세를 뽐낸다면 거기서 한 모퉁이 돌아 손씨들의 파종가 관가정(觀稼亭)이 형산강과 너른 들을 굽어보고 있다.

 

안강평야와 멀리 경주시를 조망할 수 있는 비슷한 입지에 골짜기를 달리 하여 이씨 가문의 설천정(雪川亭)1)과 손씨 집안의 수운정(水雲亭)이 있어 대비를 이루고, 남촌에 있는 강학당(講學堂)과 안락정(安樂亭)2)은 각 문중의 서당으로 대조를 보인다.

 

 

 

 

 

집을 지은 시기도 흥미롭다. 적어도 15세기 후반에서 17세기 말엽까지는 두 집안이 대략 30년마다 ‘교대로’ 집을 지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손씨가 먼저 입향(入鄕)했으므로 그 순서는 손 이 손 이······하는 식이 된다.

실제 예를 든다면 1458년 서백당이 지어지고 그뒤로 무첨당, 다시 관가정, 향단······의 순으로 두 문중의 건물들이 번갈아 들어서는 것이다.

 

 

 

 

 

한 문중 내에서의 위계 또한 마을의 공간구성에 일정한 형태를 부여했다. 대체로 한 골짜기의 가장 높은 곳에는 대종가 또는 파종가가 터잡고 있으며, 그밖의 지손(支孫)들의 주택은 그 아래 기슭을 따라 자리잡게 마련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지손들의 주택이 종가 건물보다 규모가 작게 마련이고, 사당이 대종가나 파종가의 전유물임은 당연하다.

 

 대종가나 파종가는 거의 ㅁ자집 ― 이런 형태의 집을 마을에서는 통말집이라 부른다 ― 인 반면 이들보다 나중에 지어진 대부분의 주택들은 튼ㅁ자집 ― 마을에서는 반말집이라 부른다 ― 이라는 점도 시기에 따른 양식의 변천과 아울러 문중 내의 위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분의 차이도 양동마을의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는 요소였다. 우선 길가의 낮은 지대에는 예외없이 일반 민가가 위치하며 높이 올라갈수록 양반의 상류주택이 자리해 가옥의 입지에서 계급의 차별성이 확연하다.

 

게다가 규모가 큰 상류주택에는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는 행랑채말고도 외거노비들이 사는 초가집인 가랍집 ― 또는 하배집이라 부른다 ― 이 3~4채씩 딸려 있었다.

신분제가 타파되고도 세상이 몇 번 바뀐 해방 때까지만 해도 40여 호 이르던 가랍집이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요즈음은 복원된 일부를 볼 수 있을 뿐이지만 비탈에 자리한 골기와집 주위의 텃밭은 대부분 가랍집이 있던 터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큰 도로에서 10여분 걸어서 오다 보면 왼쪽으로 안락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은 형산강, 안락천, 기계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풍수에 따르면 합수지역은 부를 상징한다고 하며 이 마을도 이러한 풍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많은 인재와 부를 지니고 있다.

 

 

 

 

 

마을 아래 자그마한 여러 동산이 모이고 집들은 이 동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서 처음에 이 마을을 찾는 일반인들이 보고 가는 것은 실제 양동마을의 1/4 정도에 불과하다.

양동마을은 항아리처럼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이다. 마을은 크게 아홉 개의 골짜기로 되어있고, 그중 일곱 개 골짜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따라서 마을 구석구석을 대충 보더라도 반나절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평지 마을은 대개 뒷산을 주산으로 형성되지만, 양동마을은 산지형으로 산 능선을 따라 두 가문의 종가와 후손들의 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래서 한층 자연과 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안산인 성주산에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눈에 전체적인 ‘물()’자 모양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철이 좋다.

이러한 유적들을 지닌 양동마을은 옛날부터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이라는 걸 증명해 준다. 입향조 이전에도 많은 조상들이 살다가 사라진 흔적이 너무나 또렷이 남아있는 곳이 양동마을이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양동마을이 현재처럼 전통 한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 아래 자그마한 여러 동산이 모이고 집들은 이 동산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서 처음에 이 마을을 찾는 일반인들이 보고 가는 것은 실제 양동마을의 1/4 정도에 불과하다.

 

 양동마을은 항아리처럼 입구는 좁고 뒤로 갈수록 넓어지는 모양이다. 마을은 크게 아홉 개의 골짜기로 되어있고,

그중 일곱 개 골짜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따라서 마을 구석구석을 대충 보더라도 반나절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평지 마을은 대개 뒷산을 주산으로 형성되지만, 양동마을은 산지형으로 산 능선을 따라 두 가문의 종가와 후손들의 집들이 줄지어 있다. 그래서 한층 자연과 더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양동마을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특히 우리의 전통 가옥들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국보 1점과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3점, 도지정문화재 5점, 향토지정문화재 9점 등이 있으며, 이 중 건축문화재로는 보물 3점(무첨당, 관가정, 향단)이 있고, 중요민속자료로는 제23호인 손동만가옥을 비롯하여 13점이 지정되어 있다

 

 

 

 

 

 

또 민속자료로는 양동 대성헌과 문화재자료인 손종로 정충비각과 향토문화재인 경산서당을 비롯하여 9점이 있다.

가히 조상의 숨결이 지금까지 살아 전해져 내려오는 건축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양동마을을 답사해보면, 여러 계곡이 모인 곳에 작은 소그룹의 집들이 모여 있고, 그 사이에는 숲이 있어 언뜻 보기에는 몇 개의 마을이 모인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편, 마을을 다니다 보면 작은 오솔길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오솔길을 따라 숨바꼭질 하듯 숲속에 숨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다.

대부분의 다른 마을들에서는 집들이 담장과 담장의 연속된 이음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양동마을은 집들마다 자신만의 담장이 있고 사대부 집들은 좀 더 멀리 거리를 이격하여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마을에는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고목이 많이 보인다.

서백당의 향나무와 관가정의 향나무를 비롯하여 회화나무가 정자마다 있다.

 

향나무는 멋도 아름답지만 사계절 푸르름을 갖추어 선비들의 강직한 사상에도 일치되기에 곳곳의 고택 앞뜰이나 사랑채 앞에는 수 백 년은 됨직한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또한 선비수, 학자수라고도 불리는 회화나무도 많이 눈에 띄는데, 이 나무는 소나무 다음으로 조선시대 우리 민족이 선호하던 나무의 하나로 정자나 공부하는 장소에는 한두 그루씩 꼭 심어져 있다.

회화나무 세 그루가 심어져 있으면 잡귀를 물리친다고 하는 벽사의 풍습도 전하는 나무로, 마을 앞에서는 느티나무를, 마을 안에서는 회화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있는 사대부가들은 대부분 뒷동산으로 나가는 협문을 두고 있는데, 뒷동산으로 연결되는 통로인 일각문을 빠져 나오면 봄에는 싱그러운 새싹과 꽃들이 만발하고, 동산마다 봄기운이 넘쳐 마을 전체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여름이면 녹음 짙은 나무들 사이로 걸으면서 뜨거운 태양을 피해 산책을 할 수 있다.

 

가을이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인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발끝의 감촉이 부드럽다. 단풍이며 집집마다 주렁주렁 열린 홍시를 보면서 결실의 계절을 느낄 수도 있다. 이와 같이 협문은 자연과 직접 만나는 통로요, 자연으로 향한 문이다.

 

 

 

 

 

 

마을 뒷동산의 하나인 물봉동산에 오르면, 멀리 안강 뜰과 흥덕왕릉이 있는 어래산이 보인다. 가깝게는 예전에 주막이었다는 초가지붕 세 채가 설창산과 어울려 그림처럼 앉아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하는 한옥의 정취가 풍기는 전통 마을의 분위기에 젖어들기에 그만이다.

 

  그리고 초가 담장 아래에는 이름 모를 다양한 색깔의 꽃들이 담장과 어울려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한다. 또 초가집 지붕이나 토담집 담장 위를 보면 다른 마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을 볼 수도 있다. 생솔가지를 담장 위에 엮어 올려둔 모양인데, 이는 벽사의 의미를 띠고 있다. 

 

 

 

 

 

 

 

 

 

 

 

 

 

 

 

 

 

 

 

 

 

 

 

불두화꽃

 

 

 

 

 

 

 

 

 

 

 

 

 

 

 

 

 

 

 

 

 

 

 

 

 

 

 

 

 

 

 

 

 

 

 

 

규모가 큰 상류주택 밑에는 외거노비들이 살던 초가집들이 3~4채씩 딸려 있었으나 지금은 복원된 일부만 볼 수 있다.

 

 

 

 

 

 

 

 

 

 

 

 

 

 

 

 

 

 

 

 

 

 

 

 

 

 

 

 

 

 

 

 

 

 

 

 

 

 

 

 

 

 

 

 

 

 

 

 

 

 

 

 

 

 

 

 

 

 

 

 

 

 

 

 

 

 

 

 

 

 

 

 

 

 

 

 

 

뒷산을 닮은 초가지붕은 그야말로 보기에 여유롭고 편안한다. 어머니의 품 같은 여백도 느껴진다.

마을 초입에 당당히 서 있는 커다란 기와집들을 많이 본 탓인지 이런 느낌은 더욱 소중하게도 생각된다.

 

 

 

 

 

이 밖에도 양동마을에는 산도 많고 집도 많다. 집과 집 사이를 지나다닐 만한 산길과 오솔길이 숨바꼭질 하듯 많은 것도 다른 마을과의 차이점이다.

집과 집 사이에는 나무숲을 통하여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다양한 나무와 사람들의 발자취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산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 여러 계곡마다 많은 집들이 모여서 거대한 마을을 조성하고 있는 마을을 걷노라면, 새로운 공간으로의 도입에 신비로움이 더하는 마을의 멋을 느끼게 된다

 

 

 

 

 

 

 

 

 

 

 

 

 

 

 

 

 

 

 

 

 

 

 

 

 

 

 

 

 

 

 

 

 

 

 

 

 

 

 

 

 

 

 

 

 

 

 

 

 

 

 

 

 

 

 

 

 

 

 

 

 

 

 

 

 

향단

여강 이씨 향단파의 종가이다.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외부에서 보면 매우 과시적이고 화려하지만 내부에서 보면 답답할 만큼 폐쇄적인 구조이다.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건물이다. 그가 전임하면서 동생인 농재 이언괄(聾齋 李彦适)에게 물려주어 농재의 후손들이 살게 됨으로써 여강 이씨 향단파의 파종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