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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과여행▒/2018년앨범

경남 진주여행/2018년 진주 남강 유등축제&국립 진주 박물관【18년10월11일】

 

 

 

 

 

 

 

 

 

 

 

 

 

 

 

 

2018.10.11.목요일

국립 진주 박물관

 

진주국립박물관에서 진주대첩 영상 관람
임진왜란 진주대첩 3D영상도 보고, 전시도 관람 했다.
진주성의 역사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수 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매일을 내 생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처럼 산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최고의 성실과
정열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한없이 진지한 인생의 자세이다.

 

 

 

 

 

 

 

 

 

 

나름대로 하루 주어진 시간속에 열심히 보내고 있다

오전 헬스장에서 보내고 그길로 카멜 장비 갖추어 진주로 향한다

피곤해도 내열정은 끝이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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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30분 출발과 전주 도착 5시전아직은 시간이 남아서 "국립 진주 박물관"둘려본다

 

 

 

 

 

 

 

 

 


창녕 말흘리 유적 출토품(昌寧 末屹里 遺蹟 出土品).  통일신라시대.

 

창녕 화왕산의 말흘리 유적은 통일신라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특히 1호 건물터 남서쪽 모서리의 구덩이 안에서 500여 점의 금동제품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불단을 장식하거나 불교의식에 사용되는 사찰용품이었다.

100여 점의 화려한 금동장식판은 꽃모양을 비롯하여 오각형, 장방형, 원형 등 다양한 형태이며 70여 점의 금동장식구와 28점의 풍탁, 자물쇠, 문고리, 마구리 장식, 손잡이 달린 향로, 사자 모양 다리 향로 등 금빛을 발하는 금속공예품들은 통일신라시대 말흘리 유적의 화려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관련 유물.

 

 

 

 

 

 

 

 

 

 

 

권응수 장군 유물(權應銖 將軍 遺物.  보물 제668호).

조선시대 무신이었던 권응수 장군의 유물들로 장군이 쓰던 물건 및 임금에게 하사받은 물건과 집안에 내려오던 유품들을 모은 것으로 유물의 내용은 권응수 장군의 영정, 선무공신교서, 태평회맹도병풍, 장검, 유지 및 장군간찰, 교지 및 유서, 각대, 가전보첩 2첩 등이다.

권응수 장군의 모습을 담은 영정은 선조 임금이 하사한 것인데 장군이 선무공신에 봉해질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며 선무공신교서는 공신에 봉한다는 공신도감의 증명서이고 태평회맹도병풍은 비단 위에 임진왜란 때의 공신을 그린 4폭 병풍이며 이번에 전시된 장검은 일본검으로 임진왜란 때 권응수 장군이 왜군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손잡이에 일본의 연호인 "대영원년(大永元年)"이 새겨져 있으며 칼집은 조선의 양식에 맞추어 새로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유지는 선조의 작전문으로 29매이고 편지인 간찰은 4매이며 벼슬 4품 이상의 명령문인 교지와 장군의 유서는 합쳐서 33매로 되어 있고 각대는 허리띠인데 금속으로 되어 있으며 "가전보첩"은 상, 하 2첩으로 되어 있는데 시가 수록되어 있어 당시 시의 서체와 시문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김명윤 유품 쌍검(金命胤 遺品 雙劍.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3호).

임진왜란 때 파주목사로 큰 전공을 세운 김명윤 선생의 검 2점이며 선조가 직접 내려준 것으로 전해지는 이 검은 한쪽 날만 가진 칼(刀) 형태를 하고 있으나 양날을 가지고 있으며 검의 등쪽에 가지가 붙어 있고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었으나 훼손되었는데 나무 손잡이가 없는 검들은 큰 것은 길이 73㎝, 폭 5.2㎝이고 다른 검은 길이 62㎝의 크기이다.

 

 

 

 

활, 화살, 화살통(弓, 矢, 箭筒).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에도 조선의 주력무기는 활과 화살이었는데 조선시대 활쏘기는 심신단련의 수단으로 가장 성행했던 무예였으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활은 물소뿔로 만든 각궁이었다.

화살은 종류가 다양하지만 전통적으로 편전, 유엽전, 화전, 신기전 등이 사용되었는데 편전은 화살발사 보조장치인 통아(筒兒)를 사용해서 쏘는 짧은 화살이고 유엽전은 화살촉이 가늘고 버들잎 모양처럼 생긴 화살이며 화전은 불을 붙여 적진에 쏠 수 있는 화살이다.

화살통은 화살을 넣어두는 통으로 전통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나무, 대나무, 종이 등 다양한 재질에다 각종 문양을 넣어 멋과 운치를 더하였다.

 

 

 

 

 

 

 

 

 

 

 

 

천자총통(天字銃筒.  보물 제647호).

조선시대의 화포 중 가장 큰 것으로 전체길이 1.31m, 통신(筒身)길이 1.16m, 구경 12.8cm의 크기이며 포 입구의 띠를 제외한 마디는 모두 8개 이다.

총신 포구 쪽에 "가정을묘시월 천사백구십삼근십냥장양내요동(嘉靖乙卯十月 天四百九十三斤十兩匠梁內了同)" 이라는 글이 음각 되어 있어 조선 명종10년(1555년)에 만들었고 무게는 493근 10냥이며 화포장은 양요동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천자총통은 우리나라의 화포 중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명문이 있는 화기 중에서도 최고(最古)에 속하는 국방과학기술문화재 이다

 




현자총통(玄字銃筒.  보물 제885호).

천자, 지자총통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유통식 화기로 조선 태종 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전체길이 79cm, 통신길이 58.7cm, 구경 7.5cm의 크기로 재질은 청동이다.

1984년 경상남도 거제군 신현면 고현만 앞바다에서 준설작업 중 발견된 것으로 약실에 새겨진 명문인 "만력병신칠월(萬曆丙申七月)" 간기에 의해 조선 선조29년(1596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작시기로 보아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화포로 오랫동안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었음에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화기의 발달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국방과학기술문화재로도 높이 평가된다.

 

 

 

 

 

 

 

 

 

 

 

평양성전투도(平壤城戰鬪圖).
조선 후기.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선조26년(1593년) 1월 일본군에 빼앗겼던 평양성을 탈환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일본군은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뒤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하고 6월에 평양성을 점령하였는데 이듬해 1월 명군은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어 조, 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과 강화를 도모하였다.이 그림은 조, 명 연합군이 평양성 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조선군은 왼쪽에 5명의 군사가 깃발을 들고 칼을 차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일본군의 일부는 조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보통문 위의 병사들은 문을 향해 달려오는 명군에 창을 겨누고 있고 명군은 말 위에서 연월도와 삼지창, 쇠도리깨 등의 무기를 휘두르며 달리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삼한시대의 토기.

 

 


쇠뿔모양 손잡이 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  삼한시대.  진주 창촌리 출토.

원삼국시대 초기 영남지역의 대표적 와질토기의 한 기종으로 목이 길고 둥근 몸체에 쇠뿔 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된 것이 특징이며 대부분 회백색을 띠는데 비하여 이 항아리는 균일하게 검은 칠을 하고 정성스레 마연된 것이 눈에 띤다.

우측의 토기는 주머니호(袋狀壺)와 손잡이 잔(把手附杯)이다.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의 초상(雲岩影堂 孤雲先生 影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통일신라 후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초상화로 정조17년(1793년)에 하동 쌍계사에서 그려진 것이며 가로 77.5㎝, 세로 108㎝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검은사모에 관리의 집무복인 관복을 입고 두 손을 맞잡은 채 높이가 긴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좌상으로 주인공을 풍만하게 나타내었으며 가슴에 있는 흉배는 화려하게 표현한 반면 허리띠의 문양은 단순하여 화폭 윗부분에 구름과 대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아래쪽 배경에는 탁자 위로 문방구를 표현해 놓았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경문왕9년(869년)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고려시대 장군 강민첨의 초상(晉州 殷烈祠 姜民瞻 影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3호).

고려시대의 장군 강민첨의 초상화이며 강민첨은 진주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시조로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나서 현종3년(1012년) 안찰사로 있을 때  침략한 동여진을 격퇴하였으며 현종9년(1018년)에는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서 거란 10만 대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대파하면서 이 공로로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다

그림 속의 강민첨은 정면에서 볼 때 약간 오른쪽을 보고 의자에 앉아 있어 고려시대 말기의 초상화와 공신도상의 양식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고려시대 백관들이 입던 공복을 입고 단령에 홀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모본으로 하여 상반신을 이모한 뒤 의좌상(椅坐像)의 형태로 전신상을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신석기시대의 토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櫛文土器)와 눌러 찍은 무늬 토기(押引文土器) 및 일본과의 교역 관계를 알려주는 흑요석

 

 

 

 

 

 

 

 

 

 

 

 

 

 

 

 

 

 

 

 

 

 

 

 

 

 

 

 

 

 

경상도 군현을 표시한 지도(慶尙道 地圖)

 

 

 

 

 

 

 

 

 

 

 

 

 

 

 

 

 

 

 

 

두암(斗庵) 김용두 선생 기증문화재.

김용두 선생은 경상남도 사천(泗川) 출생으로 어릴적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이후 사업을 하게 되면서 크게 일으킨 재일교포 사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일본에 흩어져 있는 한국 문화재를 수집하여 국립 진주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었고 국립진주박물관은 그를 기리기 위해 두암관을 개관하였다.

 

 

 

 

 

 

 

 

 

 

 

 

 

 

 

 

 

 

 

 

 

 

 

 

 

 

 

 

 

 

 

 

 

 

 

 

 

 

 

 

 

청동금은입사향완(靑銅金銀入絲香완). 
13세기.  고려시대.

 

사찰에서 사용하는 불기(佛器) 가운데 하나로 특히 입 부분에 납작한 부분(전)이 달려있고 나팔형의 다리가 붙어 있는 향로를 향완이라고 하는데 문양으로는 범자(梵字), 넝쿨무늬, 연꽃잎무늬, 여의두무늬와 함께 풀, 꽃 등이 새겨져 있으며 몸체뿐만 아니라 받침 부위에도 금은입사로 무늬를 빈틈없이 배치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정조어필-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正祖御筆-贐提學鄭民始出按湖南.  보물 제1632-1호).

정조15년(1791년) 2월에 정조가 호남으로 부임하는 정와(靜窩) 정민시(鄭民始)를 위해 직접 짓고 써준 어제어필의 행서 칠언율시로 글씨는 족자에 담겨 있으며 크기는 가로 159cm, 세로 75.2cm인데 바탕은 짙은 분홍 비단으로 금니와 은니로 모란, 박쥐, 구름무늬 등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으며 글씨 앞쪽에 "시경(詩經)"의 "천보구여(天保九如)" 구절을 새긴 타원형 양각인이 찍혀있고 말미에는 "홍재(弘齋)", "만기지가(萬幾之暇)"라 새겨진 정방형 음양각인이 찍혀 있다.

축을 보관하는 오동상자의 뚜껑 겉면에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김돈희가 1930년 윤6월에 “정조황제어제어필(正祖皇帝御製御筆)”이라 쓴 제서가 있고 뚜껑 안쪽에는 친일인사 정병조의 같은 해 발문과 일본승려 토쿠토미 소호의 1940년 발문이 쓰여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문상정사(題汶上精舍)"와 함께 정민시에게 내려준 것이며 현존하는 대폭의 정조어필 가운데 늘씬한 짜임과 유려한 필치가 돋보이는 수작으로 조맹부 또는 안평대군 서풍에 가깝우며 이런 형식의 정조어필 가운데 서예적 기량이 가장 높은 40세 기년작(記年作)이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진주성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진주성 성벽을 따라서 한바퀴 둘러보며 호국사, 촉석루, 북장대, 서장대 등을 보았다.

 

 

 

 

 

 

 

 

 

 

 

 

 

2018년 진주 남강 유등축제

 

 

진주남강유등축제(晉州南江流燈祝祭, Jinju Namgang Yudeung Festival)는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매년 10월에 개천예술제와 함께 개최되는 지역 테마 축제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이 3,800여명의 군관민으로 왜군 2만대군을 물리친 진주대첩을 거두었다.
이때 성 밖의 의병과 지원군들과 햇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것에서 유래되었다.

 

 

 

 

 

 

 

 

 

1593년 6월 29일 왜군의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7만의 민관군이 순국하였고,

그것을 달래기 위한 진혼의식과 더불어 가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원의식으로 개천예술제에서 유등띄우기 행사를 하였다.
개천예술제에서 유등놀이의 형태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으며, 개천예술제 행사의 일환으로 추진되어온 유등놀이가 2002년 10월 대규모 진주남강유등축제로 발전되었다. 보통 개천예술제보다 하루 정도 먼저 시작되어, 하루 늦게 끝난다.

 

 

 

 

 

 

 

 

 

 

2002년 문화관광부 선정 특성화 축제로 시작을 하여, 매년 소망등 달기와 유등띄우기, 풍등 날리기 등의 체험생사를 실시하였고,
2004년 문화관광부 지정 육성축제, 2005년 〈우수축제〉로 선정되었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 연속 문화관광부 선정 〈최우수축제〉로 선정되었다.
2009년에는 신종플루의 영향으로 축제의 개최가 취소되었다.

2010년과 2011년은 2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매년 대한민국 대표축제 2개, 최우수축제 8개, 우수축제 12개, 유망축제 23개를 선정, 지원하고 있다.)
2011년 10월 4일에는 세계축제협회(IFEA)가 전 세계 경쟁력 있는 축제대상 62개 분야를 시상하는 피너클어워드에서 진주 남강유등축제가 금상3개, 동상1개를 수상하여 명실공히 세계적인 축제로 인정받았다

 

 

 

 

 

 

 

 

 

 

주제::물·불·빛 그리고 우리의 소망

기간:2018년 10월 1일(월) ~ 14일(일)..2018 진주남강유등축제 현장을 가다 정말 너무너무 가보고 싶었던 진주를 다녀왔다진주유등축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진주시민뿐 아니라 관람오신 타지분들께도 즐거운 축제의 장이 되고
삼삼오오 연인들끼리, 가족끼리,축제를 즐기기 위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모인걸 보니 전국적인 축제라는게 실감이 든다

 

 

 

 

 

 

 

최근 2년간 유료로 진행되었던 남강 유등 축제가 올해부터 다시 무료로 바뀌었다.
다만 강가에 놓여진 보행자를 위한 임시 다리를 통행하는 것에는 돈을 지불해야하는 구조인데 1회권과 1일권을 판매한다.

 

 

 

 

 

 

 

 

 

 

밝은 낮에 보는 남강&진주성
늦은 밤 예쁜 노란 등불로 둘러싸인 진주성 같은 장소인가 싶을 정도로 달라 보였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것 같았던 공간.
실제로 유등에 올라가보도 미끄럼도 탈수있는데다가 만화 캐릭터가 많아서 대부분 아이가 있는 관람객들이 주를 이뤘다.

 

 

 

 

 

 

 

 

 

 

 

 

 

 

 

 

 

 

 

 

 

 

유등축제가 참 좋았던 건 단순히 유명한 캐릭터나 우리나라의 전통 문양 등으로만 이루어진게 아니라 유등마다 컨셉이나 이야기가 있었다.
속담도 있고 전래동화의 캐릭터들도 있어서 하나하나 보면서 맞춰가는 재미가 있었다

 

 

 

 

 

 

 

 

 

 

 

 

 

 

 

 

 

 

 

 

 

 

 

 

 

 

 

 

 

 

 

 

 

 

 

 

 

 

 

 

 

 

 

 

 

 

 

 

 

 

 

 

 

 

 

 

 

 

 

 

 

 

 

 

 

 

 

 

 

 

 

 

 

 

 

 

 

 

 

 

 

 

 

 

 

 

 

 

 

 

 

 

 

 

 

 

 

 

 

 

 

 

 

 

 

 

 

 

 

 

 

 

 

 

 

 

 

 

 

 

 

 

 

 

 

 

 

 

 

 

 

 

 

 

 

 

 

 

 

 

 

 

 

 

 

 

 

 

 

 

 

 

 

 

 

 

 

 

 

 

 

 

 

 

 

 

 

 

 

 

 

 

 

 

 

 

 

 

 

 

 

 

 

 

 

 

 

 

 

 

 

 

 

 

 

 

 

 

 

 

 

 

 

 

 

 

 

 

 

 

 

 

 

 

 

 

 

 

 

 

 

 

 

 

 

 

 

 

 

 

 

 

 

 

 

 

 

 

 

 

 

 

 

 

 

 

 

 

 

 

 

 

 

 

 

 

 

 

 

 

 

 

 

 

 

 

석류등나무 .
5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어떻게 색칠했을까?

워낙 큰 나무라 앵글에 다 들어가질 않아서 광각렌즈로 담아본다.

밤에 렌즈을 갈아 끼우다가 떨어뜨리고,

가슴은 쓰리고,,,ㅎㅎ.

요럴때 신랑이 없으니 힘들구낭...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을 담은 소망유등이 남강의 물결에 따라 천천히 흐르고,
 강바람이 콧잔등을 스친다.

 

 

 

 

 

 

 

 

 

 

 

 

 

 

 

 

 

 

 

 

 

 

 

 

 

 

 

 

 

 

 

 

 

 

 

 

 

 

 

 

 

 

 

행사소개 :  진주에서 남강에 띄우는 유등놀이는 우리 겨레의 최대 수난기였던 임진왜란의 진주성 전투에 기원하고 있다.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장군이 3,800여명에 지나지 않는 적은 병력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2만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진주대첩’을 거둘때. 성 밖의 의병 등 지원군과의 군사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며,
그리고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전술로 쓰였으며,
진주성 내에 있는 병사들과 사민(士民)들이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이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김시민 장군의 군사신호로,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의 도하작전을 저지하는 전술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두루 쓰였던 진주남강 유등은 1593년 6월,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통한의 ‘계사순의’ 가 있고 난 뒤부터는 오직 한마음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와 겨레를 보전하고 태산보다 큰 목숨을 바쳐 의롭게 순절한 병사들과 사민의 매운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세세연년 면면히 이어져 오늘의 진주남강유등축제로 자리잡았다.

 

 

 

 

 

 

 

 

 

 

 

 

 

 

 

 

 

 

 

 

청사초롱에 사람들이 소원이 하나하나 걸려있다.

 

 

 

 

 

 

 

 

 

 

 

 

 

 

 

 

 

 

 

 

 

 

 

 

 

 

 

 

 

 

 

 

 

 

 

 

 

 

 

 

 

 

 

 

 

 

 

 

 

 

 

 

 

 

 

 

 

 

 

 

 

 

 

 

 

 

 

 

 

 

 

 

 

 

 

 

 

 

 

도시 한가운데 강이 흐르는 곳이 얼마 없다고 하던데 남강 역시 진주를 가로지르며 오랜 시간동안 진주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늦은 밤까지 걷고, 또 걷고...
배가 고픈줄도 잊고 걷는다

혼자 이다 보니
어디서 싸 먹는것도 그렇고..
그냥 풍경에 취했던 시간들이였는것 같다

 

 

 

 

 

 

 

 

포항에서  멀어 갈까 말까 고민했었던 진주 여행.
막상 가보니 유등도 예쁘고 한적한 지방 도시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