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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과여행▒/2015년앨범

대구/남평문씨본리세거지&능소화 핀 토담길에서...【15년6월24일】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대구광역시 민속자료 제3호.

11동. 11,701㎡. 약 300년 전에 남평문씨인 문재철(文在徹, 監正公)이

지금의 대구광역시 서구 성당동 부근에 입향(入鄕),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의 5대손 문달규(文達奎)가 이곳으로 분가(分家), 정주(定住)하였다.

이곳은 남평문씨가 누대에 세거(世居)해온 전형적인 동성촌락(同姓村落)이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 인흥마을은 조선 말기의 양반가옥 9동과 별당(別堂)양식의 정자 2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들은 건축연대가 200년 미만이나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정미(精微)한 고졸미(古拙美)를 갖추고 있다.

 

특히 계획된 도로망과 격조 높은 흙담이 건물을 에워싸면서 주위의 산야(山野)와도 잘 조화되고 있으며,
당내친(堂內親)인 대소가(大小家)가 큰집의 앞과 좌우에 새집을 지어 분가한 건물 배치는 매우 이채롭다.

 

 

본래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975년 12월 30일 대구광역시 지방지정문화재 민속자료로 변경되어 다시 지정되었다.

 

 

 

 

 

구중궁궐 한 후궁이 임금을 그리며 눈물로 한평생을 보내다 꽃이 되었다는
능소화..곱디고운 여인의 한을 보여주듯 능소화는 시들기 전 꽃송이가 통채로 뚝뚝 떨어진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남평문씨 집성촌이었던 남평문씨본리세거지
기와 담장너머로​ 능소화가 아름드리 꽃을 피운다.

 

 

 

 

 

 

 

꽃말이 명예이고 예전에는 양반집 마당에만 심어 양반꽃이라도 불리는
능소화는​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딱 어울리는 꽃인듯 한다.

그 정열적인 기상과 더불어 붉은색깔 그리고 도발적인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아 기생꽃이라고 불렀다.
​요염함과 화려함으로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떨어지는것을 보면 기개가 곧은 기생을 연상케 한다.

 

 

 

 

 

 

능소화 전설

 

옛날 어느 궁궐에 복사꽃빛 고운뺨에 자태도 아리따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습니다.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어 빈의 자리에 올라 궁궐 어느 한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지요.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빈의 처소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고합니다. 빈이 요사스런 마음을 먹었더라면 갖은 수단을 다해 임금을 불러들이려 했을 것이건만, 마음씨 착한 빈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임금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비빈들의 시샘과 음모 때문에 궁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밀려나게 된 그녀는 그런 것도 모른 채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고합니다. 혹 임금의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가를 서성이기도 하고 담 너머로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기도 하며 애를 태우는 사이에 세월은 부질없이 흘러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상사병에 걸려 ‘담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쓸쓸히 죽어갔다고 합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한여름 날, 모든 꽃과 풀들이 더위에 눌려 고개를 떨굴 때 빈의 처소를 둘러친 담을 덮으며 주홍빛 잎새를 넒게 벌린 꽃이 넝쿨을 따라 곱게 피어났다고 합니다.
이 꽃이 바로 능소화라 전해진다고 합니다.

 

 

 

 

 

6월에 피는 꽃이라고 하기엔  7~8월에 피는 꽃으로 소개가 되어있다.

그러나 지금 너무나 아름답게 만개를 했오

담장에 꽃들이 활짝 피었다. 능소화는 기다림이란 꽃말이 있는데~ 그 전설 또한 너무 슬픈다.

 

 

6월의출사

 

6월이면 붉은 빛의 능소화가 드리워진 진풍경을 볼수 있는곳
이맘때쯤이면 이곳 남평문씨세거지에는 서정적인 한국의 멋이 있는 이 곳 ..
흙 돌담이라 라서 더 멋스럽고 아름다운 남평문씨세거지

 

    오늘....

 

새벽 3시 포항에서 대구 야밤에 달린다.

도착하니 새벽5시도 안되었다..병인게얌~

 

 

오랫 동안 님을기다리다 죽은 여인이 오실님을 기다리다 능소화가 되었다는 전설 토담 위에 늘어진 능소화을 보기위하여  남평문씨세거지 을 찾았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 인흥마을은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원래도 고즈넉한 토담길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매년 여름, 이맘때면 수많은 진사님들이 찾아드는 유명한 대구의 출사지가 되었다.

 

 

 

 

 

 

 

고요한 새벽5시 남들 잘 시간에 난 남평문씨본리세거지&능소화 핀 토담길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고양이처럼~

 

 

 

 

 

 

 

 

 

 

 

 

 

볼때마다 이쁜 접시꽃..

 

 

 

 

 

 

 

 

 

 

 

 

인흥마을의 흙돌담길 ....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룬 인흥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반듯반듯한 흙돌담길이 가로세로 몇 줄씩 뻗어 있다

 

 

 

 

 

언제나 보아도 좋은꽃 능소화 한옥의 풍미와 더해져서 더 좋은 능소화 전설 만큼이나 아름다움과 떨어져서도 쉬히 그 아름다움을 일어버리지 않는 지조깊은 꽃

그 능소화 나의 작은 앵글안에 넣는 순간 기분은 날아갈듯 좋아진다.

 

 

 

 

 

 

모양이 화려하든 수수하든, 향기가 짙든 옅든, 꽃들은 모두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
이 같은 꽃의 매력은 흔히 여성미와 비교하는것 같다. 이 때문에 꽃들은 저마다 다양한 형태의 여성미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같은 화려함 속에서 능소화는 완숙미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여름 꽃이다.

 

 

 

 

 

 

 

낙엽성 덩굴식물인 능소화는 여름이면 고운 주홍빛으로 전국의 담장을 장식한다.
능소화 가지에는 담쟁이덩굴처럼 흡착근이 있어 벽에 붙어서 올라가고 다 자라면 그 길이가 10m에 달하죠. 능소화라는 이름은 업신여김을 의미하는 ‘능(凌)’ 자와 하늘을 의미하는 ‘소(宵)’ 자를 합쳐 만들어졌다는군,,,.

 

하늘을 업신여길 정도로 높이 자라는 꽃. 능소화의 생태를 잘 설명하는 이름...

 

 

 

 

 

능소화는 예부터 양반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한다. 고(故)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독자라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능소화는 최참판댁 가문의 명예를 상징하는 꽃으로 등장하기 때문. 또한 능소화는 조선 시대 과거시험 장원급제자의 화관에 꽂았던 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상인(常人)이 능소화를 심어 가꾸면 곤장을 쳐 다시는 심지 못하게 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들린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자신의 모습을 능소화에 투영한 것은, 아마도 거센 장마를 견뎌내는 능소화의 강인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봄비 한 번이면 허무하게 꽃잎을 어지럽게 바닥에 흩뿌리는 벚과 달리, 능소화는 활짝 핀 꽃을 송이 채 툭툭 떨어트리면서도 의연하게 여름 내내 꽃을 피워내다.

 

 

 

 

 

또한 능소화는 명줄을 끊어내고도 결코 목련꽃처럼 남루한 행색을 보이지 않는다. 시들기 전에 가지와 이별을 고하는 능소화의 모습은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처연하다. 비에 젖어 담장 아래를 덮은 능소화의 낙화는 가지에 매달린 꽃송이보다 찬란한다. 기자는 동백 외엔 능소화처럼 낙화까지 아름다운 꽃을 본 일이 없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 ‘영광’이다. 이보다 더 능소화를 통찰하는 꽃말도 없을 듯하다.

 

 

 

 

 

 

사실  능소화의 꽃말보다 꽃에 얽힌 전설에 더 마음이 가는것 같다.
하룻밤 사랑을 나눴던 임금님이 다시 처소로 찾아오길 오매불망 기다리다 쓸쓸히 세상을 떠난 궁녀 ‘소화’.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모든 꽃들이 숨을 죽이던 한여름에 홀로 꽃으로 피어나 생전에 머물던 처소의 담장을 덮은 여인.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인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 보다.

 

능소화의 또 다른 꽃말은 ‘그리움’이다. 매년 여름 장마에 젖은 능소화를 바라볼 때면, 흘러간 노래의 한 구절을 무심코 생각이 난다.

 

 

 

 

 

 

 


“지나간 날을 그리워하면/가슴은 마냥 흩어져가고/어두운 밤을 지나노라면/한 조각 그 마음 나를 울리지/사랑의 미련 버리기에는/아직도 남은 그대 그림자/그 입술도 눈망울도/내 앞에 남아있는데/산유화여/산유화여/언젠가 지워버릴 그 마음/산유화여 그대의/숨소리는 남았네/외로움을 그리움을/버리고 버리고”(조용필 ‘산유화’)

 

 

 

 

 

 

대구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능소화가 만개를 하였다.

 

 

 

 

 

 

담벼락과능소화 넘 잘 어울린다..

꽃은 어느곳에 있는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겠지...

 

 

 

 

 

전설을 생각하면 음악 설정을 잘못 했지만 듣기에 나름이겠지 ...

 

 

 

 

 

 

 

여름꽃 능소화,,,.

담장 밑 덩굴 속에 핀 화려한 듯 고운 능소화의 빛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운 빛의 그 모습이 처연하게 아름답고  슬픈 전설에 더욱 곱게 가슴에 저민다.

비록 흘러가는 전설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이 꽃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애잔하다. 올여름에는 길을 걷는다...

 

 

 

 

 

 

대구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돌담 위로 능소화가 피고 그 아래로 꽃잎을 떨구고 있다.

 

 

 

 

 

씨각자의 시선이 머무는 능소화 핀 풍경...

성급한 객을 위해 홀로 먼저 피어 객을 반기는 능소화를 담아본다.

 

 

 

 

 

이른 새벽이라  조용하다 못해 적막함이 느껴질 정도로..

길고 정갈한 토담길에 울려퍼지는 꽃잎 떨어지는 소리에 나의 가슴도 두근거린다...

 

 

 

 

 

 

능소화는 떨어진 모습이 강렬하고 인상적인 꽃이다. 시들지도 않은 생생한 주홍빛 꽃송이를 뚝뚝 땅 위에 떨군다.

그렇게 떨어진 능소화가 어느 집 대문 앞을 밝히거나 줄기에매달려 담 위를 기어가는 것도 이 골목 안이다

 

 

 

 

 

 

비록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집안까지 살펴볼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골목만 차분차분 누비고 다녀도 마을의 풍치를 가늠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산 너머 연기나면 불난 줄 알고 담장 위로 뿔 지나가면 소 가는 줄 짐작한다지 않는가.

 

 

 

 

 

 

골목길에서 미처 볼 수 없었던 인흥마을의 건축적 특색은 마을을 대표하는 건물 수봉정사(壽峰精舍)와 광거당(廣居堂)을 통해 미루어 볼 수 있다.

 

 

 

 

 

동네 안쪽으로 들어서면 반듯반듯한 흙돌담길이 가로세로 몇 줄씩 뻗어 있다. 듣기로는 여기에 터를 잡은 마을사람들의 조상이 정전법(井田法)에서 땅을 나누듯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집을 지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실제 모습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동네가 별로 크지 않은데다 길이 곧다보니 유현한 풍정을 바랄 수도 없고 골목 끝에서 매번 되짚어 나와야  따르지만 이 흙돌담길은 차례차례 살펴보는 게 좋다. 집에 사람이 살 때, 더구나 세심한 보살핌의 손길이 베풀어질 때 ‘사람 사는 집’의 윤기가 담장을 넘어 골목에까지 반짝임을 실감할 수 있다.

 

 

 

 

 

 

집에 사람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이 미덕일 때가 있다.
고가의 경우가 특히 그러해서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 같은 집인데도 훈기가 돌고 윤기가 흘러 집이 돋보인다.

 

 


반대로 아무리 가치 있고 훌륭한 집이라도 그곳에 사람의 손길이 끊어지면 찬바람이 휘감기고 허망함이 배어나와 집의 품격이 떨어지고 수명은 줄어든다.
어느덧 미덕이 되어버린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옛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 화원읍 본리리. 같은 집안 아홉 대소가만으로 한 마을을 이룬 인흥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가 그곳이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문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

[듯995년 5월 12일 대구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다.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중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총규모 11,701㎡(3,546평)에 이른다.

18세기 초부터 남평문씨 일족이 들어와 터를 잡고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던 곳이다. 1715년에 문재철(文在徹)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하며, 문익점의 18대손인 문경호가 터를 닦았다고도 한다.

이곳은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라 한다. 그 터에 남평문씨 일족이 들어온 후 정전법(井田法)에 따라 구획을 정리하고 터전과 도로를 반듯하게 열어 집을 짓고 세거하였다. 지금은 조선시대 말에 지은 아홉 채의 전통 한옥과 정자 두 채 등 총 11호 54동의 건물이 있다. 주거지의 도로에 면한 부분에는 나지막한 담을 쌓았으며,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곳의 주목할 만한 건물로는 수봉정사(壽峰精舍)와 광거당(廣居堂)·인수문고 (仁壽文庫) 등이 있다. 특히 수봉정사는 대표적인 건물로 세거터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도 하고 일족의 모임도 열던 큰 건물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한다. 광거당은 1873년 후은공(後隱公)과 문성공(文成公)이 중국 서적 수천권을 수집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후 문중의 자제들을 위한 공간으로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로 쓰였다.

 


문중서고인 인수문고는 위의 서적과 규장각 도서를 포함하여 1만 여 권의 도서와 문중의 보물을 보존하던 건물이다. 처음에는 소규모이던 인수문고의 서고를 후에 크게 지었고, 그 이웃에 도서의 열람을 위한 도서열람실도 따로 꾸며 놓았다.

 

 

 

 

 

 

 

 

 

 

 

 

 

 

 

 

 

 

 

 

 

 

 

 

 

 

 

 

 

 

 

 

 

 

 

 

 

 

 

 

 

 

 

 

 

 

 

 

 

 

 

 

 

 

 

들어서던 골목길 꽃마차 타던 날 돌아보며 눈물짓던 담벼락에는 능소화 늘어져 그 시절이...

능소화와 여인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에서 과거와현재 공존하는것 같다..